8. 통계역학의 등장

통계학(statistics)은 인간 본성에 큰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학문이다. 개성을 존중받고 싶은 열망을 여지없이 무시하는 특성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느 순간 우리의 행동이 평균적인 소시민의 판박이 행동 양식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예를 들어, 고층 아파트 촌을 걷다가 저녁 비슷한 시간에 거실 전등이 일제히 켜지고 비슷한 위치에 놓인 비슷한 크기의 TV 화면 모습이 비치는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이 그렇다. 평균 수명이라는 단어 하나가 수많은 개인의 삶을 나이라는 단 하나의 숫자로 대치하는 무자비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도 그 예이다. 이러한 개인적인 반발심에도 불구하고, 평균 수명이라는 개념은 실용적으로 매우 중요한 용도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퇴직자에게 연금을 얼마나 지급할 것인지 결정하여야 한다면, 평균 수명을 퇴직 연령과 비교하여야 한다. 비인간적으로 비칠지라도, 이 문제에서 우리가 최종적으로 원하는 정보가 숫자 하나에 불과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저녁 무렵의 장미아파트

20 세기에 접어들 무렵, 물리학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된다. 뉴튼 역학은 개개의 입자가 어떠한 경로를 거쳤고 어떠한 운동을 할 것인지를 기술할 수 있는 혁신적인 학문이었다. 이는 마치 개인의 인생 역정을 일일이 추적하고 예측하는 것에 비길 만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뉴튼 역학은 성공적으로 천체 운동의 원인을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었다. 운동의 원칙을 발견하였으므로, 원칙적으로 모든 운동을 예측할 수 있고 현실적으로는 계산 장벽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볼츠만(1844-1906)은 이러한 철학적인 입장에 반하는 생각을 하였다. 일상적으로 우리가 접하는 물질을 이루는 원자의 개수는 아보가드로 숫자(6.02214076 × 1023) 정도이다. 이때 원자 각각에게 1, 2, 3, ... 등의 숫자를 부여한 뉴튼 방정식을 수립하는 것은 명백하게 불가능하다. 그 많은 방정식을 쓸 공간도 없고, 그럴만큼 우리가 오래 살지도 못한다. 설사 그런 작업을 끝냈다 하더라도, 그것을 이해할 능력도 없다. 우리가 결코 성공할 수 없는 방법을 계속 고집하는 것은 그다지 현명하지 못하다.

기체계를 예로 들어보자. 아마도 우리가 이 기체계에 대해 필요한 정보는 압력(p)이나 온도(T) 그리고 부피(V) 정도일 것이다. 이러한 변수들을 거시적 변수(macroscopic variable)이라고 부른다. 물론 원칙적으로 이 기체계에 속한 모든 원자들의 위치와 운동량을 뉴튼 방정식으로 계산한 결과로부터 p, V, T 를 계산할 수 있다. 

이 기체계 내 원자들의 운동을 영화로 찍는다고 상상해보자. 한 프레임에서 다음 프레임으로 연결되는 과정에서 원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뉴튼 방정식에 따라 변화한다. 원자들에게 허용되는 모든 가능한 운동이 다 찍힐 때까지 영화를 촬영하였다고 가정하자. 방대한 양의 영화가 될 것이다. 

이때 한 프레임에서 다음 프레임으로 뉴튼 방정식으로 연결되어 넘어가는 동력학적인 인과관계를 따라갈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다. 따라서 이 영화가 모두 프레임 단위로 잘라져서 연결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로 존재하더라도 우리는 잃는 것이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이 영화를 토막낸 프레임들로부터 원래 영화의 줄거리를 재구성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각각의 프레임들의 순서가 여전히 존재한다. 예를 들어, 기체가 실린더의 좌반부에 국한되어 있다가 전체로 퍼져나가는 과정을 생각한다면, 기체를 구성하는 원자들의 분포로부터 어떤 프레임이 전체 과정에서 어느 부분에 위치할 것인지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기체의 자유 팽창
이처럼 방향성이 존재하는 경우를 비평형상태(non-equilibrium)이라고 한다. 비평형상태에 통계역학적인 테크닉을 적용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므로, 기본적인 개념을 논하려는 우리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 
우리가 평형상태에 국한하여 논의하기로 한다면, 영화를 구성하는 프레임들은 모두 대등하게 될 것이다. 즉, 어떤 프레임을 영화의 어느 대목에 끼어 맞추더라도 우리는 그 차이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는 계의 동력학적인 변화를 완전히 무시하고, 각각의 프레임을 상태(state)로 생각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즉, 계의 고전적인 상태(classical state)는 계를 이루는 각 원자의 위치와 운동량이 명시된 상태로 정의된다. 양자역학적인 상태(quantum mechanical state)는 오히려 더 쉽게 정의된다. 슈뢰딩어 방정식에서 얻는 에너지 고유 상태가 바로 양자역학적인 상태가 된다. 

볼츠만은 계의 미시적인 상태(각각의 원자를 고전적 또는 양자역학적으로 기술한 상태)에 통계적인 방법을 적용하여 거시적인 성질(예를 들어, 압력 p, 부피 V, 온도 T)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뉴튼 역학의 명료함에 매혹되었던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볼츠만의 아이디어에 강력히 저항하였다. 게다가 아직 원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조차 의견 대립이 심각하던 시절이었다. 볼츠만은 마침내 그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우울증에 걸려 자살하고 만다. 

비엔나에 있는 볼츠만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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